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일대 골목
벚꽃 너머, 골목이 있더라

벚꽃은 이른 봄날 날아온 한 통의 편지. 그 편지에 답신이라도 하듯, 우리는 진해로 떠난다. 하지만 알기나 할까. 벚꽃만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에 팔려 혹은 온몸을 휘감는 꽃향내에 취해, 당신은 절대 모르고 있었을 일. 여기, 나도 있어요. 여기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벚꽃이 진 자리에 초록빛 잎이 돋아났다. 벚꽃이 지자 그 너머로 골목이 보였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중앙동 골목으로 갔다.

잔인한 아이러니로 빚은 골목

벚꽃은 없었다. 꽃향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공기를 깊게 마시며 그 자취를 짐작해볼 뿐. 하지만 꽃이 진다고 나무가 사라지진 않는다. 인구수의 두 배에 달하는 34만 7천여 그루의 진해 벚나무는 다른 색으로 여행객을 맞이한다.
진해는 일본이 군사 목적으로 만든 군항 도시이다. 도시 중앙에 중원로터리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거미줄이 뻗어 나간 모양(방사형)으로 도로를 내어, 어디든 쉽고 가깝게 갈 수 있도록 만든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다. 비록 일본에 의해 조성됐지만 근대도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 진해다.

진해의 모든 길은 로터리로 통한다. 북원, 중원, 남원로터리가 시내에 크게 자리 잡고 있고, 각 로터리를 기점으로 도로가 여덟 개로 갈라진다. 각각에서 뻗어나간 길은 서로 연결되는 골목을 만든다. 입구 하나에, 출구 여러 개가 일반적인 골목이라면 진해의 골목은 입구도 출구도 정하기 나름, 완전히 열린 모습이다. 한때는 이러한 방사형 시가지를 두고, 욱일승천기(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국기로 태양의 빛이 사방으로 발산되는 형태)를 본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지역연구 사학자들이 나서 전통적인 도시구조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둘의 모습은 닮았다.

잔인한 아이러니지만, 진해는 일제 강점기의 중심에 있던 탓에 볼거리가 많다. 벚나무와 함께 진해에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장옥(長屋)이다. 독립된 형태가 아닌 하나의 벽을 두고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인 장옥은 일본식 건물의 전형이다. 진해의 장옥은 지어진 세월이 100년을 넘겼다. 주로 1층은 상점, 2층을 주택으로 사용해왔지만 지금은 제 무게를 견디기도 버거워 보인다.

식당 한 곳을 찾아도 작은 박물관 같다. 인근에서 진한 국물과 넉넉한 고기로 칭찬이 자자한 ‘선학곰탕(등록문화재 제193호)’은 일제 강점기에 진해 요항부(해군) 병원장이 관사로 쓰던 건물이었다. 식당으로 쓰고 있긴 하나 내부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나팔 모양의 덕트와 연결된 턴테이블, 태엽을 감아 쓰는 벽시계 등의 소품은 앤티크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 곰탕의 맛도 깊고 구수하다. 한 그릇 곰탕에 일곱 개나 따라 나오는 밑반찬이 입맛을 돋운다.

낮잠 자고 싶어라, 이 골목에 누워

‘한 집 건너 해군 모르는 사람 없다’는 말이 진해에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중앙동만 해도 주민의 55％가 해군과 해군 가족이다. 그만큼 진해에서는 쉽게 해군과 마주친다. 특히 ‘원해루’에서는 그 수가 압도적이었다. 주말에는 휴가 나온 해군으로 이곳이 군대 식당인지 중국집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가 문을 연 이곳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대만 장제스 총통이 회담을 마치고 식사를 했던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하면서 외지 사람까지 찾게 되었다. 시중 중국집보다 1~2천 원 정도 저렴한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곳의 별미 중에 별미는 간짜장이다. 면과 함께 나오는 반숙 계란프라이를 톡 터뜨려 춘장 맛 강한 짜장과 비비면 아, 금세 침이 고인다.

진해는 아담하고 평온한 도시다. 적당한 햇살과 바람은 고맙게도 먼저 사람을 찾아준다. 이런 골목을 걷다 보니 한잠 푹 잤으면 싶다. 도로가 왜 있을까 싶을 만큼 차도 없다. 주변이 조용하니 마음도 차분해진다. 내친 김에 ‘진해우체국(사적 제291호)’으로 향했다. 실제 업무를 보는 우체국 신관 건물에서 엽서를 사, 구관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도 묻지 못한 지인에게 보내는 선물. ‘여기는 진해예요. 지금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엽서를 받는 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여행을 시작하겠지. 설레는 마음을 함께 빨간 우체통에 넣었다.

우체국을 등지고 서니, 길 끝에 수없이 펼쳐진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고개를 젖히니 하얀 탑이 있다. 저 위에서 바라본 진해는 어떨까. 제황산은 해발 107m의 낮은 산이지만, 산 정상의 8층짜리 진해탑 꼭대기에서라면 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모노레일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일 년 계단’을 오르면 좋겠다. 365개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365개의 시름을 내려놓으면 더 좋겠다.

골목 구경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궁금한 마음이 솟으니, 보이는 세계가 다르다. 그 마음을 따라 부지런히 걸으면 여행은 늘 충만하다. 여행자의 자세를 잊지 않으려 한다. 우리 삶이 여행 같아질 날을 기대하면서.

벚꽃보다 벚꽃빵!

진해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이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만발하는 벚꽃을 보러 온다. 벚꽃이 아니어도 볼거리가 풍성한 진해지만 잎만 무성한 벚나무를 보며 아쉬울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진해제과(055-546-3131~2)에 들러보자.

진해제과에는 벚꽃 대신 벚꽃빵이 있다. 벚꽃의 다섯 개 꽃잎 모양을 그대로 닮은 이 빵은 진해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소문나 있다. 올해 군항제 기간에만 하루 4만 개씩 불티나게 팔렸다는 후문. 모양만 벚꽃을 닮은 게 아니다. 벚꽃 진액이 첨가된 분홍색 앙금은 벚꽃의 색이다. 낱개에 6백 원, 10개 세트가 6천 원이다. 벚꽃빵의 달달함이 벚꽃을 보지 못한 서운함을 달래주리라.

출처 : 월간샘터 2013년 6월호 (http://www.isamt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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