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HISTORY OF K-SURE

임직원 에피소드

한국무역보험공사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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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 명의도용 사기사건을 막아라”

신용평가팀 추현규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가을, 명절 직전의 어수선함 속에 부산에 있는 수출자가 상담을 원한다는 메모를 전달받았습니다. 메모에는 수출자가 자신이 거래하는 수입자와 공사 신용조사보고서상 수입자가 다른 것 같아 상담을 원한다는 짤막한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수출자가 상담을 원하는 내용은, 우리가 판단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수출자 스스로 잘 판단하시라고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가벼이 여기고 수출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출자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상담 한번 받고 싶었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영국 소재 수입자가 메일로 거래를 요청하여 신용조사 보고서도 받아보고, 중소중견플러스 보험에 가입도 해있으나, 명의도용 사기건일 경우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걱정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셨나요”라는 제 물음에, 국외기업 신용조사 신청을 할 때 뜨는 배너내용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며,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최근 몇 년간 유럽 등 선진국 소재 수입자를 사칭하고, 아프리카 등으로 선적을 요청하는 명의도용 사기사건으로 우리 수출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여, 신용평가팀에서는 신용조사 신청 시 해당 내용을 확인하고 주의하시게끔 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본인의 사례가 그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입자가 먼저 수출자에게 이메일로 컨택을 시작하여 거래를 제시하였고, 영국 기업임에도 케냐에 Branch가 있다며 케냐로 선적을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고객께서는 아무래도 첫 거래인지라 조심스러워 국외기업 신용조사 보고서 확인 후, 수입자가 부동산 개발업을 하고 있으니, 직접 건설을 하기 위해 공업용 고무롤을 주문하는구나 여기고 거래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의도용 사기사건 피해예방 배너가 머리를 맴돌아,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을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통화를 하면서 아, 이건 분명히 정상적인 거래가 아닐 가능성이 높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었고, 추가 확인을 해보고 연락을 드리기로 하고 통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우선, 수출자가 전달해준 수입자와의 메일상 확인되는 수입자 메일 주소의 도메인으로 수입자 홈페이지에 접속하였습니다. 건설과 관련된 깔끔한 홈페이지였으나 메인에서 상세 페이지로 들어가는 ‘Learn More’ 버튼들이 비활성화 되어 있어 수상한 느낌이 들었고, 메인화면의 모든 배너를 클릭을 해보던 중 드디어 상세 페이지로 연결이 되는 버튼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런데 넘어간 페이지는, 해당 업체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회사였습니다. ‘다른 회사 홈페이지를 가져다가 위장한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주소창을 확인하니, 홈페이지 제작을 도와주는 디자인 플랫폼 회사의 도메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홈페이지는 플랫폼 회사에서 운영하는 샘플 홈페이지였고, 수입자는 샘플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만 그대로 가져다가, 수출자와 연락하는 연락처만 확인이 되도록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또한, 한국인터넷진흥원 도메인 정보조회 사이트에서 확인한 결과, 해당 홈페이지는 2021년 3월에 개설된 것으로, 2013년에 설립된 순자산 GBP 5천만 수입자의 홈페이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나 이것만으로 명의도용 사기라고 보기는 어려워, 수입자가 제공한 P/O상 수입자 대표자 서명의 진위 확인이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영국의 경우, 등기소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영국기업의 대표자, 사업자등록번호, 업종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기업들이 업로드한 재무제표, 각종 신고서류 등도 확인이 가능하기에, 등기소에 업로드된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본 결과, 2014년 등기소에 제출된 대표자 변경 신고서류상의 서명과 P/O상 서명이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확인이 되자, 정황상 무역사기건으로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에, 수출자께 홈페이지의 허술함, 수입자의 업종과 거래물품이 맞지 않는 점, 대표자 서명 불일치 등을 안내드리고, 수출자가 수입자와 교신한 메일에는 수입자의 재무제표도 있었는데 이런 정보들은 수출자의 신용을 얻기에는 유용하나, 모두 영국 등기소 홈페이지에서 누구라도 확인이 가능한 문서일 수도 있다는 점 등을 설명하며, 우선 거래 중단을 권고하였습니다.
하지만, 매출액 18억 규모의 중소기업에게 14만 달러 상당의 거래는 결코 작은 거래가 아니기에, 해당 수입자가 사기 수입자라는 정확한 증빙은 없는 상태에서 이대로 마무리 짓기에는 조사가 미흡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은, 파리지사 앞 진성수입자 앞 컨택을 요청하였습니다.

파리지사에서는 진성수입자 소재지로 등기우편을 발송하여 해당 거래를 진행한 바 있는지, 홈페이지 운영 중인지 등을 질의하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회신이 오지 않아 추가 확인 방법을 고심하던 차에, 한 달 여만에 이메일 회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성수입자는 홈페이지 운영하고 있지 않으며, 한국수출자와 거래도 하지 않았음을 확인해주어 이로써 해당 거래가 사기가 분명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담 전화를 받은 지 한 달여 만에, 명의도용 무역사기건에 대한 조사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거래를 하는 수입자가 보고서상 진성수입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몫은 여전히 수출자에게 남아있지만, 그 판단의 과정에서 충분히 의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명의도용 사기수출 피해 예방 캠페인, 그리고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준 우리 팀 전체와 파리지사의 노력이, 우리 기업의 사기피해를 차단하는 데 도움이 되었음이 너무나 뿌듯했던 경험이었습니다.

“특별 모니터링 시스템이 빛을 발하다”

국내보상채권부 이성림

M사 사태 이후 공사에서는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인수, 리스크관리제도를 전반적으로 보완하고 신규 제도를 도입하였다. 특히 리스크총괄부 모니터링팀에서는 무역사기를 사전에 적발하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입체적인 모니터링 도입을 여러모로 모색하였다. 이 일환으로 2015년에는 ’특별모니터링‘을 도입하여 시행한 바 있다. 2016년 7월에는 수출채권 유동화 종목 이용업체의 공사 앞 수출(대출)통지 내역을 통해 이상 징후 포착을 하는 ‘수출통지 이상 징후 모니터링’제도 도입을 검토하였다.

모니터링팀은 동 제도 도입 필요성 검토를 위해 공사 이용업체들의 통지 내역을 살펴보던 중, A사 통지의 이상패턴을 포착했다. 이에 추가 확인을 위해 인수부서 협조 하에 A사의 매입서류를 은행으로부터 입수하였다. A사의 매입서류, 통지내역 및 영업현황 등을 살펴본 결과, 여러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통지건의 특정 패턴이 포착되었으며, 수입자 소재지와 대금송금지가 불일치하고, 수출단가도 통상적인 가격보다 높은 수준으로 보였다. 또한 수출자의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급신장(동업종 평균 대비 이상 급증)하고 있었다. 허위 수출 및 수출단가 조작 등을 통한 매출 부풀리기가 의심되었다.

한편, A사는 마침 인수부서 앞 추가 선적후 수출신용보증서 발급을 요청한 상태였다. 모니터링팀은 일단 인수부서 앞으로 A사 앞 추가 보증서 발급 보류를 요청하고 공사 북경 및 상해지사를 통해서 수출입자간 거래사실 등 조사에 착수하였다.

수입자 앞 질의 결과, 수입자는 수출자와의 거래사실을 부인하면서 수출대금 송금지에 지사도 없고 계약서 도장도 가짜라고 했다. 이후 수입자는 말을 바꾸다가 답변을 회피했다. (수출자의 회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공사는 수출입자 간 거래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인수부서에 은행 앞 추가 매입 중지 통보를 요청하였다. 인수부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매입중지를 요청함으로써 선적후 신용보증 및 네고보증 한도 전액 총 220만 불을 회수할 수 있었다.

유관기관 공조를 통해 사기 혐의를 적발하고 더 큰 국민 피해를 예방하다
A사는 2018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기관투자자, 자산운용사 등 투자자를 적극적으로 모집해 왔고, 투자 및 대출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가는 상황이었다. 수출사기의 최종 목표는 IPO로 보였다. 금융기관, 수많은 기관 및 개인 투자자의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5년 7월 공사와 관세청은 ‘무역·외환거래 질서 확립 및 수출입기업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공사는 동 협약에 의거, A사의 허위수출 및 수출단가 조작 혐의 등에 대해 관세청 앞 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관세청이 수출자를 압수수색하고 현지법인까지 장기간 조사한 결과, 혐의를 입증하여 동 결과를 검찰 앞 이관하였다. 검찰은 수출자 대표자 및 임원을 기소했고 결국 2018년 2월 관세법 위반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이 확정되었다.

【관세청 조사결과】
ㅇ 수출자는 가치 없는 폐웨이퍼 가격을 부풀리는 등 허위 수출신고로 실적을 조작했으며, 홍콩소재 페이퍼 컴퍼니로 해당 물품을 발송한 후 허위 수출채권을 매각해 매입대전을 유용

ㅇ 수출채권의 만기가 도래하면 다시 수출채권을 은행에 매각해 마련한 자금으로 홍콩에 보관 중이던 폐웨이퍼를 고가 수입후 자금을 이전, 대출금을 상환하는 ‘뺑뺑이 무역’을 반복

본건은 우리 공사가 A사 무역거래의 이상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여 관세청과의 협업 하에 수출 사기를 먼저 적발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M사 사태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M사 사태 이후 강화한 모니터링시스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공사는 이상 징후 감지 후 발 빠르게 선적후 신용보증 등 220만 불을 회수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관세청과의 협조로 해당 업체가 범죄행위를 계속하여 생길 수 있는 더 큰 국민 피해를 사전에 예방했다.

이는 모니터링팀뿐만 아니라 인수부서, 북경지사 및 상해지사 등의 긴밀한 협업으로 얻은 값진 열매였다.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복잡한 수출서류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끈질기게 혐의를 파헤친 모니터링팀, 모니터링팀을 믿고 조사에 힘을 실어준 리스크총괄부장, 신속히 한도를 축소해 피해를 줄인 인천지사, 수입자를 접촉해 허위거래 사실을 밝혀낸 북경지사와 상해지사의 합작품이었다.

“Mobile-K Office 방문, 수입자가 없었다.”

준법감시팀 안정철

2016년 겨울 중앙지사에서 근무할 때로 한 해 동안 정신없이 중소중견기업 수출지원 마케팅 및 인수업무를 하면서 차츰 연말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수출기업의 한도청약 및 현지실사 요청으로 Mobile-K Office* 출장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출장지인 베트남이란 곳은 우리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었고 급성장 중이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그해 겨울 중앙지사 젊은 직원 2명이 Mobile-K Office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에 하노이지사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공사 지사도 수출기업 현지사무소도 없었던 터라 준비할 사항은 많았지만 급하게 잡힌 일정으로 준비시간이 부족했었고 우리는 그냥 호기있게 포켓와이파이 하나만 들고서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서로 위안을 삼으면서 출국을 하게 되었다.

출장 일정상 우리는 인천에서 일요일 오전 7시 아시아나편으로 출발을 했다. 베트남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초록색 마일린(Mailinh) 택시를 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블로그를 봤었으나 역시 실전은 달랐다. 공항에서 호객꾼(마일린 마일린을 외치고 있었음)을 따라가 막상 탄 택시는 그게 아니었고 택시비 바가지를 당해서 결국 시내 숙소까지 몇천 원이면 될 것을 몇 만 원 이상을 지불하게 되었다. 또한 숙소 체크인을 하고 나서 잠깐 공원을 산책하던 중 다가온 구두닦이가 신발 밑창에 고무 하나를 덧댔는데 또 몇만 원 바가지, 완전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 바로 여기였다. 물론, 이때만 하더라고 말로만 듣던 베트남의 오토바이족 등 이국적인 풍경에 빠져있었고 베트남 화폐인 동 단위가 워낙에 커서 환전 시 우리나라 원화로 얼마인지 와닿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음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출장업무를 준비하여 수입자 방문 및 실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수입자 두 곳 실사는 기대했던 대로 잘 마쳤고, 코트라 무역관도 방문하여 관장님과 좋은 얘기도 많이 나눴다. 다만, 문제라 할 수 있는 문제가 마지막 일정에서 발생했다. 이날 현장실사가 예정된 수입자는 시내에서 외진 우리나라로 치자면 시화공단 정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포켓와이파이를 켠 후 구글맵을 작동하고서 숙소 바로 앞에서 콩커피 하나를 산 다음 기분 좋게 허름한 로컬 시내버스를 탔다. 중간중간에 현지인들이 타기도 내리기도 하면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게 진정한 베트남을 느끼는 것이지 하면서 도시와 시골, 산업화된 공간 등을 여유롭게 체험하면서 1시간 30분가량 소요 후 수입자 주소지 근처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서 수입자 주소로 대략 15분 정도 걸어가니 이곳은 거의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에나 나올 법 한 뒷골목 같은 곳이 펼쳐졌다. 그런데 또한 이날 우리는 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겠지만 이상하게 대부분의 가게들이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완전 음습한 그런 기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이게 뭐지 이런 기분이 들면서 오늘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수입자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걱정부터 이런 곳은 한 발자국도 그 거리에 들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까지 만감이 교차하였고, 진짜 그때의 여러 느낌들은 그 시간 그 공간에 있게 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대략 5분 정도 망설이다가 그 구역으로 들어갔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이 수입자를 보려고 이 멀리 베트남까지 왔는데 못 만나면 어떻게 하지? 아! 수입자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한도책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얼마 후 내려진 셔터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응답이 없었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수입자 대표에게 핸드폰 전화를 걸었는데 다행히 수입자 대표와 통화가 되어 잠시 후 셔터를 올리고 사장이 나왔다. 셔터가 ‘드르륵’ 소리를 내고 올라가는 그 순간 여기까지 왔는데 수입자를 못 만나고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이제는 ‘아 살았다’, ‘수입자 현장실사가 가능하겠구나’하는 환희로 바뀌었고 그 순간이 너무나 반가웠다. 사장을 따라서 들어가니 건물 1층은 재고품 창고, 2층은 사무실(직원 4~5명 정도), 3층은 가정집으로 본인이 사용하고 있다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어서 이어진 사장의 회사소개와 질의응답 및 현장실사를 잘 마치고서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해 사실 돌아가는 길이 또 애매하던 차에 사장이 우리 다음 일정을 물어봤고 우리는 롯데센터 하노이**라고 얘기를 했더니 사장의 눈치가 거의 9단인지 본인이 먼저 흔쾌히 어차피 점심 약속으로 시내를 가야하니까 가는 길에 태워주겠다고 하였다. 본인도 롯데센터 하노이는 자주가고 특히나 롯데마트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무실을 나와서 1층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사장이 선글라스를 끼고 고가의 랜드로버 레인지오버 SUV를 주차하는 것이 아닌가? 사무실 및 현장실사에서는 일 얘기만을 하다가 멋쟁이로 사장이 나타나니 사람이 달리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무실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이런저런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니 사장은 호치민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여 선박수리 관련 영업에 성공하여 건물도 자기 것이며 다른 사업체도 몇 개 더 운영하고 있고 베트남에서 꽤나 성공하여 자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수입자의 재무자료 미비에 따른 한도책정에 있어서 처음 우려와는 달리 긍정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파악되어 신청한도금액 전부를 신속히 책정해주었고,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Mobile-K Office 초창기 아프리카, 중남미 장기출장 등 완전 고생하던 이런 시기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이런 것이 우리가 직장인으로서 월급쟁이이지만 수출기업 지원이라는 소명 완수와 일하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성취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Mobile-K Office
신용조사가 어려운 수입자를 직접 방문하고, 수입자의 비재무적 요소를 반영하여 지원하는 무역보험 One-Stop 서비스로서 성장 잠재력이 큰 신흥시장을 선점하여 수출기업의 수출활력을 제고하고, 무역보험의 지원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도입한 제도(2011년)

** 롯데센터 하노이
롯데백화점을 비롯해 롯데호텔, 롯데마트, 롯데자산개발 등 롯데그룹의 글로벌 전략을 수행하는 핵심계열사들 한 곳에 모여있는 베트남 제2의 초고층 빌딩(2014년 준공)

“2020년 새해, 이란 테헤란에는 쉴 새 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핀테크기획팀 유용호

2020년 1월 새해부터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주재하던 한국 주재원들은 접속불량으로 잘 터지지도 않는 인터넷을 연신 리프레쉬 해가면서 뉴스 속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지시간으로 1월 2일, 전 세계의 언론은 진짜 뉴스인지 믿기 힘든 뉴스로 도배되었는데, 미국의 최첨단 드론이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현지에 방문한 이란의 최고 군부 실세인 솔레이마니를 암살했다는 뉴스가 그 내용이다. 이란에 주재하던 한국주재원들은 새해 다음날 갑자기 비상탈출용 배낭을 준비해서 현관 앞에 두고 언론 보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이란과 미국이 오랜 적대관계에 있었다 한 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요인암살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그 사실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는 미국 정부의 언론 브리핑 모습은 진짜 뉴스인지 믿기 힘들 정도였다.

뉴스 이후 전 세계는 이란과 미국의 전면전 우려까지 언급해가며 이란의 대응에 주목했고, 특히 암살된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오랫동안 이란 국민의 존경을 많이 받아온 인물이어서 추모식이 있던 날은 테헤란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기도 했다. 이란의 보복이 있을 수 있고 자칫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주재원들은 비상탈출 계획을 세우면서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피의 복수까지 언급하던 이란의 대응은 예상보다 차분했고 사용하지 않는 미군기지를 향해 미사일 폭격을 퍼붓는 것으로 이란의 보복은 마무리되었고, 전면 충돌 직전까지 치달았던 미국과 이란의 갈등상황은 일단락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해 2월 이란은 또 다른 일로 어수선했다. 신정일치의 독특한 정치제도로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국가 최고 권력자로 종신직으로 나라를 통치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제의 공화국이라 우리와 똑같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투표로 선출하는 묘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4년마다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는데 마침 2020년 2월 21일이 총선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어수선하기만 상황에서, 총선 몇 주 전부터 이란 전국에 독감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총선 1주일 전 즈음, 이란 정부는 사망자 원인이 독감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고민에 빠지고 만다. 총선이 너무 임박한 상황에서 총선을 중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무슨 대책을 마련할 수도 없고, 결국 이란 정부는 총선이 끝날 때까지 국민들에게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고 선거를 끝냈고, 그 사이 투표장을 아무 의심없이 다녀간 수많은 이란 국민들이 집단 감염되며 이란의 코로나는 다른 나라들보다 폭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코로나 초기 확산세가 가장 폭발적으로 발생했던 두 나라, 한국과 이란, 한국은 중국과의 상품거래, 인적왕래가 원래도 많았으니 당연하겠고, 이란의 경우 미국의 오랜 제재로 전 세계가 이란과의 무역거래는 물론 인적왕래마저 중단되어 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중국만이 상품거래는 물론 사람의 왕래도 이루어지던 터라 한국과 이란은 코로나 팬데믹의 소용돌이 가장 선두에 나서며 확진자와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란에게는 더욱더 치명적인 핸디캡이 하나 더 있었다.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로 의약품, 의료 인프라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인데다가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복원 이후 외국으로부터의 의약품 수입이 꽁꽁 막혀있다 보니 갑자기 발생하는 비상상황에 산소 호흡기조차도 충분한 양을 갖추지 못하고 늘어나는 코로나 감염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불과 한달 전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던 이란 국민들은 드디어 코로나 확산 상황에는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란에 거주하던 한국 주재원들도 마찬가지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코로나 발생 초기에 코로나 백신도 치료약도 없던 시절이지만 만약에 이란 현지에서 감염되면 그 유명한 타이레놀도 없는 이란에서 산소호흡기 마스크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변을 당하는 건 아닌가 전전긍긍하면서 마음을 조릴 수밖에 없었다. 감염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조심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해 3월이 시작되자 이란주재 한국대사관은 한국에서 전세기를 띄워 이란교민과 주재원을 한국으로 후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준비과정에서 비행기를 확보하는데 까지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는데, 한국 항공사가 이란까지 직항운행을 해본 경험도 없고, 이란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 나중에 미국의 제재 적용문제가 걱정이 되어 한국 항공사는 이란까지는 날아올 수 없다며 난색을 보인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인근 두바이 공항까지만 와서 기다리고, 이란의 주재원들은 두바이 공항까지 새로운 이동수단을 확보해야 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인 결과 이란국적 항공사에 도움을 구해 테헤란에서 두바이까지는 이란 항공기를 타고, 두바이에서 서울까지는 한국 항공기를 타고 귀국하는 루트를 만들었고, 3월 18일 드디어 테헤란을 떠나 두바이 공항에 도착, 두바이 공항에서도 이란발 승객들은 공항청사에 들여보내주지 않아 활주로 한가운데 내려 도보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그렇게 약 80명의 교민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공항에서 곧바로 준비된 버스를 타고 성남의 한 공공기관 연수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2주간의 격리생활을 하며 생전 처음 받아보는 코로나검사를 받는다고 눈물을 찔끔 흘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20년 새해 다음날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시작해서 2월의 이란 총선과 코로나 확산, 그리고 결국 3월 한밤중 두바이 공항 활주로를 걸어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국으로 돌아온 석 달의 시간은 아마도 인생에 가장 스펙타클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소기업Plus+ 보험 상품 개발과정”

혁신윤리기획팀 이동원

2006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공사 역사상 가장 많은 신상품이 도입되었다. 당시 공사의 모든 보험제도 개발을 담당하던 영업기획부에는 영업기획팀과 국제협력팀이 함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이질적인 두 개의 팀이 함께 있었던 것인데 이는 Coface, NEXI 등 해외 ECA들과의 협력과 벤치마킹을 통해 신상품을 개발하고,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 시기는 공사가 창립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조선업 호황에 힘입어 중장기보험 지원실적이 매년 100%씩 성장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황금기에 해외지사별 재판매보험, 중장기수출보험(표준이상형), 해외사업금융보험, 기술수출보험, 포페이팅보험, 서비스종합보험, 문화수출보험, 농수산물패키지보험, 원자재가격변동보험, 탄소종합보험, 중소기업Plus+보험, 투자위험보증 등이 새롭게 만들어진 보험제도들이다. 엄청난 보험제도가 쏟아지던 때였다. 혹자는 수요조사 없이 보험제도를 양산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고 벤치마킹하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어 가장 다이나믹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포장된 기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부서의 막내로 2년 반 정도를 지내며, 그 시기에 함께 했던 많은 선배님들을 통해 가장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중소기업종합보험’,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공사에 몇 명밖에는 없을 것 같다. 2008년 초 지금의 공사 대표상품인 ‘중소기업Plus+보험’이 처음 기획될 당시의 이름은 ‘중소기업종합보험’이었다. 당시 단기수출보험을 이용하는 중소기업 수는 1,700여 개사에 불과하고, 신용보증을 포함해 공사의 중소기업 지원실적은 전체 지원실적의 15% 남짓이었다. 공사의 4차 중장기경영계획(2008~2012)에서 중소기업의 수출보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상품이 바로 ‘중소기업종합보험’이다.

당시 최초 콘셉트는 연간 수출실적 U$ 1백만 이하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는 한도책정, 수출통지, 결제통지 등 단기수출보험 이용을 위한 절차를 생략하고, 연 단위로 보험계약 체결을 통해 수출과 관련된 미회수 위험, 클레임 위험 및 환위험 모두를 담보하는 상품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2008년 1월 당시 영업기획팀에서 상품개발팀으로 분리되었으며, 중장기경영계획TF팀원이었던 이영수 부장님이 당시 동 상품의 출시 사명을 갖고 상품기획팀의 최초 팀장으로 부임하셨다. 이영수 팀장님, 나, 이선정 대리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된 단촐한 팀이었지만, 오픈마인드에 격의 없는 팀장님, 훌륭한 동료와 함께, 무엇보다도 정부 요구자료 등 잔업 없이 상품개발에만 매달릴 수 있어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중소기업종합보험의 처음 기획은 수출실적 U$ 1백만 이하 중소기업들이 보험가입만 하면 환위험까지 모두 커버하는 제도였다. 보험요율 책정 방식 및 책임금액 개념까지 공사 보험제도 중 일반 손해보험 개념을 도입한 공사 최초 그리고, 유일의 보험이 아닌가 싶다.

제도 도입 과정에서 환위험이 제외된 부분은 많이 아쉬웠던 점이다. ‘환위험? 청약 및 결제통지도 없이 어떻게 운영하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수출자의 총 수출거래를 관세청 통관 자료를 기준으로 수출거래별 환차손익을 계산하고, 순환차익에 대한 환수는 없이 순환차손 발생 시 연간 한도(3천만 원 또는 5천만 원) 범위 내에서 보상하는 콘셉트였다. 당시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환수금 미납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이라 환변동보험에 대해서는 공사가 부담하는 위험이 없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수출기업의 환차익에 대한 환수가 없다는 원리에 대한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매년 증가하는 환변동보험 인수실적을 고려할 때 새로운 상품을 기획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지금과 같이 관세청과 통관정보가 연계되고, 금융기관과 결제정보가 연계가 가능하다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제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여러 부서의 논의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살아남게 된 위험이 수입자위험, 신용장위험 및 수입국위험이다. 중소기업들이 친숙하게 제도를 접근할 수 있도록 용어에 있어서도 기존의 신용위험과 비상위험을 대체하여 수입자위험, 신용장위험 및 수입국위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거래방식에 따라 수출자들은 수입자위험과 신용장위험 중 기본위험 한 개를 선택하고, ‘수입국위험’은 특약으로 선택하도록 하여 수출자들의 보험료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설계하였다. 그러나, 보험고객인 수출자에게는 친숙할지 몰라도 공사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용어에 대해 어색해하고,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었던 기억이 있다.

보험요율 설계 시에는 대수의 법칙을 가정하여 일반 손해보험에서 활용하는 보험사고 빈도(Frequency)와 보험사고 심도(Severity)를 적용하여 요율을 산출하였다. 자동차보험 요율서를 펼쳐놓고, 이것저것 공부해가면서 일반 손해보험사의 보험요율 산정방식을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보험종목의 사고율처럼 보험금지급액을 보험금액으로 나누어 산출하는 방식을 적용하지 않고, 과거 중소기업 사고 발생률(빈도)과 사고건당 평균보험지급금(심도)을 활용하여 위험별 보험요율을 책정하였다.

상품개발 단계, 부서별 협의 과정에서 가장 큰 이슈는 ‘연속수출 면책’을 적용 배제하는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도 보상심사과정에서 연속수출 문제는 수출자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심사요소였던 터라 이 면책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국외보상채권부의 반발이 가장 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국외보상채권 부장님은 지금은 퇴직하신 이순배 부장님이셨다. 국외보상채권부에서는 연속수출 면책조항 적용배제에 강한 반대 입장이었으나, 우리 팀 입장에서도 ‘연속수출 면책’ 적용 시에는 상품성이 크게 훼손되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핵심사항이었다. 과거 면책비율, 사고율 및 책임금액 등을 고려한 시뮬레이션 자료 등을 준비하여 매일 같이 국외보상채권부를 찾아갔었다. 수차례 협의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이순배 부장님께서 흔쾌히 제도 취지에 동의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경영위원회 논의 시 핵심적인 쟁점은 ‘국별인수방침의 적용 배제’였다, 경영위원회에서 동 상품이 국별인수방침을 적용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우려를 표하였고, 관련하여 치열한 논의를 거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전체 국별인수방침을 적용하진 않되, 인수중지 국가에 대해서는 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요강을 통해 수정 운영한다는 의견을 추가하여 의결되었다.

이런 부서별 협의과정, 경영위원회 논의과정을 통해서 최종 탄생한 보험이 ‘중소기업Plus+보험’이다. 당시 경영위원회까지 ‘중소기업종합보험’으로 올라갔었지만, 경영위원회 논의과정에서 당초 기획과 달리 환위험, 클레임위험 등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종합보험’은 상품 성격상 명칭이 적절하지 않다며 상품 출시 전 상품명을 다시 정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후 ‘신속보험’, ‘간단보험’ 등 여러 후보군 중에 탄생한 이름이 지금의 ‘중소기업Plus+보험’이다. 당시 일반 보험상품 이름에 ‘플러스’가 유독 많이 들어간 영향도 있었다. 이름을 정한 후에도 ‘+ 넣네, 빼네’, ‘영어로 하네, 한글로 하네’ 등 부서 내에서 엄청난 논의가 있은 후 전무후무하게 특수문자를 공사 보험약관에 넣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Plus+보험’도 출시한 지 이제 14년이 넘었다. 이제는 공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상품으로 성장하여 운영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상품 출시 당시 참여했던 팀원으로서 뿌듯한 마음도 있고, 한편으로는 당초 제도 취지와 달리 운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중소수출기업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베트남에서의 무역보험 채권회수 이야기”

국내보상팀 김성목

“에고... 오늘도 출장을 가야 하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제발 되지도 않은 거짓말이라도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문전박대만 안 당했으면 좋겠네.”

이것은 내가 베트남 호치민에 있을 때 출장 가기 전 혼자 주로 했던 푸념이다. 사고조사나 채권추심 출장은 이미 채무 수입자분들의 재무, 경영 상황이 좋지 않거나 공사 수출 고객분들과 분쟁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수입자 사무실이나 공장을 찾아가면 일단 수입자분들이 우리의 신분을 확인 과정에서 들여보내 주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출장을 나온 이상 뭐라도 하나 보고할 것을 건져가야 되는데 이런 경우를 겪게 되면 사무실로 복귀해서 지사장님은 물론 본사에 보고할 거리가 없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굳은 철문으로 닫혀있고, 수위 아저씨가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보고, 승인 후 우리를 들여보내 주거나 말거나 운에 맡기고(물론 문밖에서 우리 현지직원이 제발 면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읍소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신원 확인 과정이 느슨한 사무실을 찾아갈 때는 일단 무작정 사무실을 방문해서 수입자 대표나 담당자를 찾은 후에 우리 소개를 하면 그 사람들도 그때는 이미 늦은지라 우리를 쫓아 내보내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응대를 해주는 경향이 있어서 투 트랙으로 나누어 방문조사를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의 방문이라 좋은 기억보다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많은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같은 건물에 있는 유관기관, 은행 직원이랑 티타임을 가지는 중에 우연치 않게 하노이 소재 공사 채무수입자의 법원 앞 채권신고 소식을 접하게 된 적이 있다. 사무실로 복귀해서 법원에 연락하니 기한이 바로 다음 날까지라, 지사장님께 보고 후, 비행기 표·숙소 알아보고, 출장비 처리 및 필요 서류를 부랴부랴 챙긴 후 그날 저녁에 바로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비행기 타고 날아간 적이 있다(그 당시에는 하노이지사 개소 전이라 호치민에서 베트남 전 지역을 커버하였다).

저녁에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올라가는 도중 비행기 흔들림은 어찌나 심하던지. 여하간 그날 하노이 도착,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그랩(베트남 우버) 차량기사와의 네고를 통해 호치민 갈 때까지 사용하기로 하고 다음 날 하노이 북쪽에 위치한 법원을 찾아가 담당 공무원을 만나 우리 소개를 하고 겨우 채권신고를 하였다. 급하게 처리하느라 부족한 서류는 추후 보완하기로 하고 말이다(이후에는 베트남 법원 홈페이지를 주기적으로 찾아가 향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완했다).

하노이까지 간 김에 채무 수입자를 방문하고자 구글 맵을 기본으로 주변에 있는 공장 사람들에게 그 위치를 탐문하여 겨우겨우 공장을 찾아가 우리 소개를 하니 당연히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고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왔으며 어차피 망한 기업 구경이라도 하게 안에 들여 달라고 간절히 읍소해서 겨우 공장 안으로 진입하였다. 이미 거의 가세가 기운 기업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으나 때마침 정문 앞에서 담배 태우고 있는 분이 한국사람인 것 같아서 또 우리 소개를 하고 채무수입자를 아는지 물어보니 자기는 여기를 임차해서 사용해서 잘 모른다고 하길래 체념하고 돌아가려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둘러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에 2층에 올라가 보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두려운 마음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래도 내부를 잠깐만이라도 보자 싶어 기웃거리니 저 먼 곳에서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너무 어두워 무섭기도 한지라 현지직원도 들어가기를 꺼려하길래 억지로 달래어 ‘나를 따르라’하고(그때는 겁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금 같으면 못할 것 같은데.) 불빛이 새어 나오는 사무실을 노크하니 예상치 못하게 안에 몇몇 현지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일단 무작정 들어가서 또 우리는 누구이고 호치민에서 왔는데 혹시 채무수입자에 대해 알거나 들은 게 있냐고 물어보니 자기들끼리 눈을 맞추더니만 자기들이 얘기했다고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저기’ 맞은편에 아마 당신들이 찾는 채무수입자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해주어(아마 우락부락한 외국인이 와서 불쌍한 표정을 지은 게 통했는가 보다) 또 시커먼 어둠을 뚫고 맞은편 사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사무실에 채무수입자 뒷수습을 하는 현지직원이 있어서 또 우리는 누구이고 호치민에서 왔고 채무수입자도 거의 회생이 불가해서 본인한테 피해도 크지 않을테니 제발 협조를 해달라고 설득해서 당시 채무수입자의 상황 및 대표자 변경 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사무실 복귀 후 지사장님 및 본사에 보고한 기억이 난다.

그 외 외딴 채무수입자 주소지를 몇 번 허탕치다가 수소문 끝에 방문하였으나 분명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앞에서 초인종만 누르다가 문전박대 당한 일, 겨우 찾아간 또 다른 채무수입자는 내가 묻는 말에는 하나도 똑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기 남편이 검사라고 하는 사실만 유난히 강조하던 일도 생각이 난다.

물론 좋지 않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고 수출고객의 현지법인 직원한테 채무수입자 공장이 재개발 호재가 있어 매입자가 나타날 것 같다는 소식을 활용하여 같이 방문해서 분할 상환 약정서를 체결하고 회수한 일, 채무수입자가 한국 분인데 집요한 연락 및 수차례 방문, 채무상환 독려 및 송금 문제를 해결하고 채무 잔액을 전액 회수한 일 등 보람이 있는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그때는 한국무역보험공사 해외지사 Second Man으로서 밥값하기 위해서 나름 열심히 근무했던 것 같다. 또한 해외지사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업무가 덜하다는 선입견도 깨고 싶었고, 쑥스럽지만 국부유출 방지라는 우리 공사 본연의 기능을 위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다지 우호적이지 많은 않은 현지 사정(비자 연장, 지사 인허가, 노동허가서 발급 등 관련 불필요한 행정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이지만 별 탈 없이 무사히 임무수행을 하고 복귀해서 개인적으로 다행이고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모잠비크 공항에서 겪은 황당 에피소드”

홍보부 이창규

2014년 모잠비크에서 추진되던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현장실사를 위해 당시 B 팀장님과 함께 아프리카 출장길에 올랐다.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광물 기업 V社와 사우디 A社, 일본의 M社가 사업주로 참여하였으며, 생산된 전기는 V社의 광산 운영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사업주의 안내를 받아 대주단으로 참여 예정이던 금융기관 담당자들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전세기를 타고 V社가 운영하던 대규모 광산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광산 규모에 놀라며 사업성은 괜찮을지, 환경 문제 등 잠재적인 위험요인은 없을지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았다.
무사히 현장실사를 마치고 귀국을 위해 모잠비크 현지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진행했다. 일본의 차관 원조를 받아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공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있고 깔끔했다. 개발도상국 공항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스스로에게 조금 머쓱해졌다.

정상적으로 탑승수속을 마치고 세관을 통과하여 게이트에서 탑승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갑자기 Security 야광조끼를 입은 직원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말을 걸었다. 자기 상관이 우리를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며 따라오란다.
“My Boss is waiting for you. Follow me”.
황당함에, 함께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던 A社 사업주 담당자를 바라봤지만 그는 먼 산만 바라보았다. 세관까지 통과하여 출국절차를 완료한 상황에서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시 순진했던 나로서는 혹시나 수속에 문제가 발생했을까 불안한 마음에 팀장님과 함께 그를 따라나섰다. 여권에 출국도장을 찍어줬던 세관을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반대 방향으로 통과하여 탑승수속을 했던 항공사 게이트에 도착했다.

우리를 찾았다던 상관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항공권을 확인하더니, 옆에 앉아서 기다리던 학생들로 보이는 긴 머리의 서양 여자분들에게 건넸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뭐하는 것이냐’며 따지는 나에게 상관은 항공권 배부가 잘못되었다는 답변과 함께 다음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것을 도와줄 테니 잠시 기다리란다.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반박하기도 벅차고, 팀장님을 모시고 있던 부담감에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탑승게이트에서 직원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다음 비행기 티켓을 구해준다니 1~2시간만 기다리면 되겠지. 복합적인 감정이 오갔다. 당시 함께 있던 A社 사업주 담당자는 이미 이륙해 떠난 상황이라 도움을 청할 길이 없었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항공사 게이트로 돌아가 다음 항공권을 알아봐 주겠다던 상관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미 퇴근했단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옆에 있던 직원에게 항의했으나 그는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결국 현지 항공사측의 아무런 도움 없이 항공권 발권을 도움받았던 국내 대행사 직원에게 연락하여 다음 날 비행기 표 예매까지는 겨우 성공했으나, 이미 여권상으로 출국 상태였던 우리들의 신변이 훨씬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법적문제로 현지에 감금되는 것은 아닌지. 당시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다른 사업주 M社에 한국인 담당자가 있어 연락하여 상황을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며칠 더 현지에 체류예정이던 그는 손수 공항에까지 나와 여러 가지 현지 루트를 통해 문제 해결방안을 찾아주었다. 결과적으로 세관에서 문제없이 출국 취소 절차를 마치고 호텔에 하루 더 머문 후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다.
만일 국내 공항에서 발생했다면 별 것 아닌 상황일 수도 있었으나, 당시 입사 3년차였던 나에게는 타국에서, 그것도 저개발국이었던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던 당황스러운 에피소드가 절대 잊지 못할 웃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중장기부서에서 근무하다 보면 저개발국, 오지로 출장을 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출장 과정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들이 종종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담당자들은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니기를... 충고 아닌 충고를 해본다.

“신입사원 현장 연수의 끝판왕 공채 25기 해비타트”

국외채권팀 정헌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입사한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신입사원 연수를 비대면 온라인 연수위주로 진행했다고 한다. 대면 연수도 있기는 했으나 과거와 같이 다 같이 모여서 제주도 등지의 합숙소에 모여서 하는 연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10년 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뮤직뱅크 1위를 휩쓸던 2012년 9월이 떠올랐다.

시작과 발대식
아직도 나는 왜 우리 기수가 입사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해비타트를 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아무튼 어느 순간 인사팀으로부터 해비타트 연수 참가 의사를 묻는 메일과 전화가 왔고, 당연히 동기끼리 해외에 간다고 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여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과의 발대식 행사에 참석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신입사원이라 아무것도 몰랐고, ‘원래 이렇게 발대식을 하나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굉장히 모험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단순한 연수도 아니고 ‘해외의 오지에 가서 집짓기‘라니. 혹시나 사고라도 생기면 상당히 난처할 텐데. 이를 추진해준 연수 담당자분들의 혁신적인 노력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인도네시아 작업 시작
우리가 해비타트 활동을 한 곳은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시(市)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반둥시로 이동하여 호텔에 짐을 푼 시간은 밤 12시가 넘어서였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아침 7시 반에 호텔 입구에 모여 인력시장에 모인 인부들처럼 2대의 조그마한 봉고차를 나눠 타고 작업장소인 마을로 향했다.

사실 출발하기 전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짓겠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장소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작업이 우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닥공사부터 철근 만들기, 시멘트 섞기 등 공사판 근처도 안 가본 우리 25기에 의해서 실제 집이 지어진다고 생각하니 걱정도 앞섰다.
현장은 생각보다 더웠다.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도 제대로 없었다. 현장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그늘막은 당연히 없었고, 화장실도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물론, 남자인 나는 견딜만했지만, 여자 동기들은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 대전충남지사에서 근무하는 모 동기는 현지의 치즈를 잘못 사 먹고 복통과 설사로 병원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시멘트 섞기
건축 공정은 대부분 우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삽, 호미, 양동이 등을 제외하고는 ‘장비’ 혹은 ‘기계’라고 불릴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손가락 굵기만한 철근 40개를 쇠톱으로 자르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는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공사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시멘트 섞기’도 엄청난 작업이었다. 한국에서야 레미콘이 알아서 시멘트와 모래, 물을 섞어서 만들어주지만, 당시 해비타트에서는 우리가 알아서 시멘트, 모래, 물을 비율에 맞추고 삽과 손으로 섞어줘야 했다. 시멘트의 비율이 너무 높거나 낮으면 소위 말하는 ‘부실공사’의 우려가 생기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공사 기간 내내 김성목 팀장님과 진성민, 권구환, 이정렬 차장은 살아있는 레미콘이 되어 섞고 또 섞었다.

미장 - 근골격계 질환의 자가진단키트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해비타트의 압권은 ‘미장’이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에게 ‘미장’이란 중학교 시절 국어시험에서 ‘멋쟁이’, ‘소금쟁이’ 등과 함께 맞춤법 문제에 등장하는 보기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실제 몸소 체험해 보니 미장은 두 번 다시는 해보고 싶지 않은 일이 되었다. 코로나19가 아닌 데도 마스크와 수건으로 온 얼굴을 가린 후, 자꾸만 흘러내리는 시멘트를 벽에다 때려 붙이는 ‘미장’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수행과 가까웠다. 비스듬히 숙여서 시멘트 반죽을 손삽으로 떠서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벽에다 ‘찰싹’ 때리듯이 던져야 반죽이 흘러내리지 않고 붙었다. 그러나 너무 세게 때리면 시멘트가 온 몸에 튀어버리기 때문에 던지는 구속(?)을 적절히 잘 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매끈한 벽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시멘트를 때려 얹고 하다 보면 목, 허리, 어깨, 손목, 무릎 중 자신의 취약한 관절이 어느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목표달성 압박과 잔업
예정된 목표 준공(?)일이 다가오자 업무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자신의 체력에 맞게 일하라던 인솔자도 차츰 휴식시간을 줄이더니, 마지막 날에는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까지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 동기들도 점점 말수를 줄여가며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어느 곳이나 사업계획 달성을 위한 실적압박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집은 점점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마지막 페인트 작업을 끝으로 집이 완성되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현지인들의 마음이 언어를 넘어 눈빛을 타고 전해져왔다. 우리가 지은 집에 거주하시게 될 어르신께서는 앞이 보이지 않으셨는데도 그 분과 완성된 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 왠지 울컥하면서도 조금 더 좋은 집을 지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연신 “트리마까시(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신입사원 초기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즐거운 추억이며, 다시 한번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그 당시에는 힘든 기억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신입사원들에게 앞으로 이 해비타트를 추천하고 싶냐고 하면 1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추천하고 싶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확실한 것은 이 해비타트로 인해 우리 동기들이 더욱 끈끈해졌다는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입사 20년 기념으로 국내 해비타트라도 다시 한번 동기들과 같이 떠나고 싶다.

* 현지 아이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았던 김지은 차장. 현지에서 슈퍼주니어가 인기가 있기에 우리는 그녀를 슈퍼시니어라고 불러 그녀의 매력을 기렸다.

“S사 경영관리단 근무 및 기업회생 관련 에피소드”

인천지사 최용진

나는 2011년 7월부터 2012년 12월 말까지 1년 6개월 동안 S사 조선소 현장에서 경영관리단원으로 근무했고, 이후 법정관리반장으로 2013년 11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S사의 워크아웃 종결과 손익정산 및 기업회생절차를 담당했다. 경영관리단원 근무 시 자금집행과 기업 회생절차 신청 직전 마지막 남은 1척의 선박을 인도하기 위해 S사 노조와의 협상 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 본다.

김포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사천공항에 도착 후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 통영시 미륵도에 위치한 S사 조선소로 첫 출근한 때는 2011년 7월 첫 월요일 아침으로 기억된다. 내가 S사에 부임했을 때는 이미 기술력이나 일정상 건조가 어려운 선박들에 대해서는 건조계약 취소 후 보험금을 지급하였고, 출자전환 등을 통해 채권단이 경영권을 확보한 상태로 회사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2011년 하반기 6개월 동안은 건조 완료된 선박들의 인도가 안정적이어서 자금 사정은 다소 안정적이었다. 내가 했던 주요 업무는 회사의 인장관리와 자금집행이었다. 인장은 매일 아침 경영관리단장으로부터 받아 재경팀에 인계하고 마감 후에 다시 받아 경영관리단장실 내 금고에 보관하였다. 재경팀이 모든 자금지출을 관리하였는데 매일 아침 재경부장과 함께 전날의 지출 및 수입 등 일일 자금수지와 당일 지출예정 내용을 정리하여 경영관리 부단장 및 단장에게 보고하였다.

급여, 복지 등 일반 관리비뿐만 아니라 구매부에서 상신되는 모든 원・부자재 구입비까지 일체의 자금집행 문서에는 내가 사인을 하고 인터넷 뱅킹으로 이체를 직접 승인해야 자금이 지출되는 시스템이었다. 재경팀은 나와 가장 접촉이 많은 팀이었고, 그래서 가장 친하게 지내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재경부장은 2012년 하반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팀원 대부분이 회사를 떠나 재경부장이 엑셀을 작성하는 등 실무를 직접 했고, 나중에 회사가 회생절차에 들어갔을 때도 신청실무를 담당하는 등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S사 노동조합(이하 노조)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에피소드도 있다. 2011년 하반기에 노조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창원지부와 연계하여 회사의 영속성을 위한 선박 신규 수주를 요구하며 조선소 야드에서 간간히 집회를 하며 노동가요를 틀어대곤 하였으나 직접적으로 선박 건조공정에 지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경영관리단이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야드에서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단결투쟁을 외치며 집회를 진행하였는데 당시에는 조합원들 숫자가 많아 집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상황을 주시하며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노조가 민주노총 창원 금속노조 지부장(S사 노조 위원장 출신이었음)과 함께 통영의 각종 시민단체와 조선소 주변 상인들을 끌어모아 회사에서 회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된 선박 대금을 채권단이 회수해 간다고 주장하며, 조선소를 점거하거나 선박 건조를 중단해서라도 신규 수주를 하도록 채권단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그동안 진행된 채권단의 자금투입 상황을 설명하다 나중에 좀 흥분하여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경영관리단 착임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원・부자재 구입 견적서와 매주 월요일 아침에 참석했던 임원회의 자료에 쓰인 영문 약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선박 부품들은 전부 영문으로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고, 조선소 건조공정 관련 회의자료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약어 외에도 S사 조선소 자체적으로 쓰는 약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적서는 품목명, 용도, 단가 등을 매번 구매부장이 직접 설명하도록 했고, 회의자료는 회의참석 전에 기획부장을 찾아서 내용을 미리 물어보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임원회의 시 기술담당 상무가 선박 건조공정 진행사항에 대해 보고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몇 달이 지나고 조선소 자금상황이나 건조공정에 대해서는 많이 익숙해지면서 통영에서의 생활도 다소 여유가 생겼다.

2012년 접어들어 건조공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자금사정도 여의치 않아 가끔 급여 지급이 늦어지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에 직원들뿐만 아니라 임원들도 회사를 그만두기 시작하면서 회사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존의 기술담당 상무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술부장이 상무로 진급했고, 나는 당시 건조 중이던 전체 선박을 호선별로 정리하여 일일 건조 상황을 본사 앞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때 새로 상무가 되신 분과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내다 보니 많이 친해지기도 했다.

2012년에 진입하면서 S사가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는 글로벌 조선경기 침체와 낮아진 신규 발주 선박 가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존에 조선경기가 호황일 때 높게 계약했던 선박들의 선주측에서 선가 할인을 위해 건조공정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당시 선급이었던 노르웨이 DNV에서 공정단계별 검사 증명서 발급을 미루고 재공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공사비 추가 투입뿐만 아니라 공정이 지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노조는 회사의 영속성을 위한 신규 수주를 요구하면서 2011년보다 자주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2012년 3분기쯤으로 기억되는데 자금수지를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 직원들뿐만 아니라 파견 근로자들의 급여 지급이 3개월가량 밀린 적이 있었는데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된다. 노조 집행부는 사무실까지 와서 큰 소리를 내기도 했고, 기획부장 및 재경부장과는 의견차이로 서로 서먹해지기도 했다. 공정이 지연되면서 인도기일을 맞출 수 없었고,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인도협상을 진행하면서 페널티에 의한 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원래 예상했던 자금수지를 도저히 맞출 수가 없게 되었는데 추가 자금지원을 위한 채권단의 결의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던 때였다. 당시 원・부자재 납품대금은 현금 결제 및 1~3개월 어음결제를 하였는데, 소액인 현금결제와 1개월짜리 어음은 결제를 해주기도 했지만 금액이 비교적 큰 2~3개월짜리 어음은 납품업체에 사정하여 연장하여야만 했다.

건조공정 진행을 위해서 원・부자재 납품대금 지급을 우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급여지급이 3개월 동안이나 미뤄지게 되었다. 이후 채권단의 추가 자금지원이 일부 이루어지긴 했으나 자금난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현장직 근로자는 외주업체 소속이라 일당제로 상여금이 별도로 없었고 관리직은 급여 외 상여금이 별도로 있었는데 미지급 급여의 50%를 지급하기로 하면서 기획 및 재경부장과 관리직의 상여금 포함 여부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결국 내 의견대로 관리직 상여금은 다음번 채권단 추가 자금지원이 있을 때 지급하기로 하고 현장 근로자와 동일하게 급여만을 기준으로 해서 50%를 지급하였다. 한참 후에 채권단에서 추가로 자금을 지원해 밀린 급여를 모두 지급하였지만 당시 그런 결정을 하면서 참 많이 미안했다.

2012년 말 나는 인사발령으로 S사를 떠나게 되었고, 잠시 S사를 잊고 지내다가 2013년 7월 법정관리반장이 되었고 2013년 11월경 워크아웃 거의 마지막 단계에 있던 S사를 다시 맡게 되면서 S사와의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시 S사를 맡았을 때는 건조 중이던 선박이 다 인도되고 마지막 1척이 남아 있었는데 신규 선박 수주가 없어 그 배를 인도하고 나면 워크아웃을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S사에 대한 처리 방안은 기업회생절차를 통해 M&A를 진행하던지 아니면 파산을 진행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업회생절차나 파산절차 진행 전에 남은 1척의 선박을 정상적으로 인도하여야만 했다. 마지막 선박은 공정이 거의 98%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선주는 인도해 가고자 했으나 노조는 마무리 작업을 거부하고 있었다. 노조는 마지막 선박을 인도하고 나면 채권단에 대한 자신들의 협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며 마지막 선박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 2013년은 노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인데 우리 공사 본사 사옥 앞에서 몇 차례 시위를 하기도 했고, 경영관리단원으로 조선소 현장에 근무하고 있었던 나의 후임자였던 황지만 과장은 사무실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등 사실상 감금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S사를 다시 맡고 내부적으로는 기업회생절차 후 파산으로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정했고, 마지막 배를 인도하기 위해 노조와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미 처리 방향이 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솔직히 상황을 전달했었던 것 같다.

이후 노조의 내부 노선 정리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으나 결국 마무리 선박 건조공정을 진행할 수 있었고 기업회생절차 신청 전 마지막 남은 1척의 선박을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다. 만약 인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업회생절차를 진행했다면 아마도 기업회생절차 신청 및 인가과정에서 오랫동안 작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어 인도가 불가능했거나 건조 후 매각하더라도 훨씬 더 낮은 가격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S사는 이후 기업회생절차를 진행하면서 두어 차례 M&A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고, 최종적으로 파산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